15년 전 스티브 잡스의 애플 복귀는 쓰러지기 직전의 애플이 다시 태어나는 반환점이 되었다. 복귀 후 8달 만에 애플의 iCEO에 오른 잡스는 냉엄하면서도 예리한 전략으로 망각의 단계에 들어서던 애플을 구해내는데 성공한다.
스티브 잡스가 작고한지 1년이 되어가고 있는 지금, 풍전등화 상태의 애플을 살리기 위해 애플 복귀 직후 내렸던 7가지의 중요한 결단들, 그런 결단들을 지금 다시 짚어보면 좋을 것 같다.
잡스는 하루에만 수십 가지의 결정을 내렸을 터, 이 글은 그런 결정 하나하나를 다루는 철저하고 완벽한 논문이 아니다. 이 글에는, 예를 들어, 아이맥이나 OS X, iPod 같은 신제품 개발을 주도한 그의 몇몇 중요 결정들은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보다는 기업 운영 측면에서 애플을 살리기 위해 어떤 결단을 내렸는지를 정리해 보려 한다.
■ 고삐를 잡다
스티브 잡스가 내린 결단 중 가장 중요한 결단은 애플을 다시 그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꼭 그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아니였다.
NeXT 인수를 1996년 후반에 마무리 지은 당시 애플의 CEO 길 아멜리오(Gil Ameilio)는 1997년 1월에 잡스를 애플의 특별 고문역으로 채용한다. 잡스는 고문역 위치에서 있으면서 조언이나 하고 권력 전쟁에서 빠져 있어도 상관없없다. 하지만 이런 것은 잡스의 체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잡스는 애플의 이사회에 아멜리오를 축줄할 것을 발빠르게 종용했다. 그리고 잡스가 그의 대체자로 지명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사회는 잡스의 의견을 수용했고, 애플의 고삐를 다시 잡스에게 맡기게 된다.
■ 군살을 빼다
잡스가 돌아오기 전의 애플은 어지러울 정도로 복잡하고 다양한 매킨토시 데스크탑 라인업과 랩탑군, 서버 변종 모델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또한 별로 이문이 남지도 않는 프린터 제품군과 디지털 카메라, 그리고 각종 주변기기들을 생산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해 잡스는 애플의 전체 제품의 70%에 해당하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내쳐버린다. 이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직도 몇몇 사람들의 가슴 한켠이 욱신거리게 만드는 뉴튼 PDA 경우를 들 수 있다.
잡스는 과거의 잘못된 경험을 잊고 완전히 새출발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앞으로 애플이 생산할 매킨토시를 네 조각으로 나뉜 격자로 분류했다. 두 개의 조각은 컨슈머 데스크탑(아이맥)과 랩탑(아이북)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나머지 두 조각은 전문가용 데스크탑(파워맥)과 랩탑(파워북)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네 조각의 격자 밖에 있는 제품들은 모두 끝을 맞이한게 된다.
iCEO 직을 맡은 첫 해 내린 잡스의 이런 제품군 축소 정책으로 인해 3,000명에 이르는 직원이 해고되었다. 제품군과 직원수의 축소는 처음엔 고통스러웠지만 평범한 제품을 수없이 생산해 내는 대신 소수의 훌륭한 제품 생산에 집중할 수 있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다.
■ 구조 조정
1996년 애플 이사회는 어떻게 하면 애플을 타기업에 더 비싼 가격에 팔아넘길 수 있을까를 골몰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잡스는 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신에게 굳건한 충성심을 보일 멤버들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잡스는 이사회 대부분의 멤버들로부터 사직서를 받아내는데 성공하는데, 1977년도에 잡스와 워즈니악에게 애플을 세울 종자돈을 빌려준 전 애플 CEO 마이크 마쿨라(Mike Makkula)도 이 중 한명이었다.
이들이 비운 공석은 현 오라클의 CEO인 래리 엘리슨(Larry Ellision)이나 애플 부사장직을 맡았던 빌 캠벨(Bill Campbell)같은 잡스의 측근들로 채워진다.
iCEO가 되기 전의 잡스는 NeXT 핵심 인재들을 애플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리에 앉히기 위해 길 아멜리오를 설득했다. 그 결과 OS X 탄생의 주역 아비 테바니안(Avie Tevanian)이 1997년 2월에 애플의 소프트웨어 부문 수석 부사장을 맡게 되었고, 몇 달 뒤 존 루빈스테인(Jon Rubinstein)이 하드웨어 엔지니어링의 수석 부사장직을 맡게 된다. 이후 잡스는 회사의 한정된 자원을 놓고 서로 경쟁하는 여러 제품 단위(Product-centric) 개발 팀들을 싸그리 정리하고, 마케팅 부서와 영업 부서, 생산 부서, 그리고 회계 부서 네 부문으로 회사 전반을 개편한다.
그후 오래지 않아 NeXT의 베테랑 직원들과 ’새로운 CEO’에게 충성할 직원들이 줄줄이 고용되면서 잡스의 급진전인 정책에 반기를 들 임원은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 누설을 막다
애플 CEO 길 아멜리오를 당황하게 만들고 기존 정책 노선을 변경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정보 유출이 애플 직원들에 의해 번번히 자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불순한 움직임은 스티브 잡스 체제에서 완전히 뿌리뽑히게 된다. 임시 CEO직을 수락한지 얼마되지 않은 스티브 잡스는 애플의 직원들이 언론과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노-프레스(no-press) 정책을 제정한다. 앞선 정리 해고에 이어 잡스의 이런 기조강한 정책은 회사 내의 이견을 진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몇 년 후, 잡스의 노-프레스 정책은 애플 신제품 발표회의 비밀과 서스펜스 그리고 환호를 이끌어 내는 효과로 나타난다. 외부로 흘러나가는 정보를 꽉 움켜지고 컨트롤함으로서 잡스는 언론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었다.
■ 앙금을 풀다
첫 재임기간 동안의 스티브 잡스는 PC 시장을 전쟁터로 묘사하며 애플과 IBM 사이에 적대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장본인이였다. 또한 그런 분위기의 확장 선상에서, IBM 하드웨어에 운영체제를 제공하던 마이크로 소프트가 그래픽 인터페이스로 유명한 애플 운영체제의 룩 앤 필(Look and Feel)을 복제를 이유로 애플 vs 마이크로소프트로 대결 구도가 이어졌다.
애플과 MS 사이의 원한은 잡스가 애플에서 사임한 1985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마이크로소프트, 혹은 윈텔(*Wintel=Windows + Intel)에 대한 깊은 혐오는 그 후로도 애플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는 동안 매킨토시의 시장 점유율은 한 자리 숫자로 내려 앉았다.
1996년 애플로 돌아온 잡스는 데스크탑 PC 전쟁은 이제 그 끝을 맞았고 그 승자가 마이크로 소프트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취한다. 애플이 이겨낼 수 없는 마이크로소프트와의 대결을 위해 돈과 에너지를 털어넣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 애플은 그 스스로의 기준 안에서 냉철한 자세로 경쟁에 임해야 했다. 또한 레드몬드의 거인(=마이크로소프트)과 직접적인 경쟁을 하기 보단 협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쓰러져가는 애플에게도 나은 선택이었다.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크로스 라이센스 딜 성립 후 마이크로소프트는 상당한 인력을 투입해 이후 5년 간 매킨토시용 오피스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개발하게 된다.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의 성공을 진정으로 독려한다는 것을 보증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애플의 주식을 취득하기로 약속했다. 그 대가로 애플은 인터넷 익스플로어를 매킨토시 운영체제의 기본 웹브라우저로 5년간 사용하는데 동의한다.
1997년 보스턴에서 열린 맥월드(Macworld)에서 스티브 잡스가 발표한 이 유명한 협정(스티브 잡스 뒤에 있던 커다란 스크린에 빌 게이츠가 등장)은 맥 매니아들에게 두 회사의 앙금이 풀어졌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스티브 잡스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성공하더라도 그것이 애플 성공에 해가 되는 것이 아니며, 애플도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 발표했다. 마이크로 소프트에 대한 잡스의 이런 입장 변화는 그 동안 구속되어 있었던 애플의 멘탈 에너지가 자유롭게 발산되는 것으로 이어졌고, 개발자들과 팬들이 쾌쾌묵은 주제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장을 정복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 복제품을 말살하다
1994년부터 애플은 기기당 80불의 비용을 받고 Mac OS를 몇몇 하드웨어 업체들의 운영체제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1년 후 이 라이센스 정책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애플에게 가장 높은 수익을 안겨주던 제품군이 이런 저가 복제품들에게 밀려 매출 감소를 겪어야 했고, 라이센스 정책을 통해 맥 플랫폼을 획기적으로 확장하려던 애플의 계획도 크게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애플로 돌아온 스티브 잡스는 Mac OS 라이센스 프로그램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1997년에 출시된 Mac OS 8부터 써드파티 업체들의 라이센스 요청을 스티브 잡스가 거부하면서 라이센스 프로그램도 자연스럽게 중단되게 된다. (UMAX 이 한 업체는 어떻게 OS 8을 1998년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하드웨어에서부터 소프트웨어에 이르기까지 사용자 경험을 애플이 총체적인 통제해야 한다고 믿었던 스티브 잡스, 하지만 애플 이외의 업체가 하드웨어를 만든다는 것은 이런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복제품들에 의해 희석된 매킨토시 브랜드, 만약 아직까지 복제품들이 생산되고 있었다면 애플하면 떠오르는 ‘비밀 엄수’, ’욕구’라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며, 애플을 지금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해준 제품을 생산했던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 조나단 아이브를 신뢰하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1996년에는 조나단 아이브가 애플 디자인 팀의 수장을 이미 맡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조나단 아이브는 이미 애플을 떠나리라 마음먹고 있었지만 스티브 잡스의 회사 전반에 관한 프레젠테이션은 보고 난 후 돌연 회사에 남기로 마음을 바꾼다.
스티브 잡스도 처음에는 디자인 부서의 수장 자리에 외부 스타 디자이너를 영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이브와 대면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관계는 개인적인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디자인 철학에 대한 상대방의 주요 생각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다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렇게 새로 찾은 동지애로 인해 스티브 잡스는 새로운 외부 인사가 아닌 비교적 경험이 적은 디자이너에게 신뢰를 쏟아 붇는다. 그리고 이 한 쌍(물론 디자인팀의 노력도 포함해)은 이제껏 없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컨슈머 전자 기기 디자인을 창조해 내게 된다.
▶ 성공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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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와 아이의 체험공간
▶ 생활의 노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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