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규모 테마파크(놀이공원)인 미 플로리다의 디즈니월드는 월트 디즈니(1901~1966) 사후 5년 만인 1971년 문을 열었다. 개장식에서 한 직원이 미망인 릴리 디즈니 여사에게 말했다. “디즈니씨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요?” 디즈니 여사는 “그는 이 모습을 벌써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곳에 디즈니랜드가 건립된 것이지요”라고 답했다. 월트 디즈니는 디즈니랜드를 구상하던 순간부터 이미 이 모든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떠한 시련과 좌절에도 꿈을 간직하고, 마침내 꿈을 현실로 이룬 사람들에게 우리는 찬사와 박수를 보낸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좇아 실현하고, 꿈을 나누어 꿈으로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는 리더. 이런 리더를 ‘비전형 리더(visionary leader)’라고 한다. 그 비전형 리더의 대표주자가 바로 월트 디즈니다.

디즈니는 초년 시절 실패와 좌절을 유독 많이 겪었다. 뛰어난 상상력을 갖고 있었지만,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캔자스에서 삽화 만화가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창의력이 없다”는 악평을 들었고, 초기 제작했던 단편 만화 영화들도 대부분 실패했다. 하지만 어떤 시련도 확신에 찬 그의 꿈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주린 배를 채우려 거리를 헤맬 때나 사업에 실패해 실의의 나날을 보낼 때조차도 “실패했지만 실패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 젊은 시절에 고난을 겪는 것은 중요한 통과의례”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의 인생에서 실패란 그를 올곧게, 강하게 만들어 준 디딤돌이었던 것이다.

어린이들의 영원한 친구 미키마우스는 실패의 쓰라린 경험 속에서 탄생했다. 디즈니가 지저분한 창고에서 궁핍하게 지내던 시절, 생쥐 한 마리가 허물어진 벽 틈에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빵 부스러기를 던져주자 생쥐는 조심조심 디즈니의 곁으로 다가왔다. 동병상련을 느낀 그는 생쥐에게 ‘몰티마’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몰티마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쥐 ‘미키’의 모델이 됐다. 디즈니는 1928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찰리 채플린의 이미지를 몰티마에 얹어서 깜찍하고 지혜로운 ‘미키마우스’라는 캐릭터를 창조했다. 그는 “당신이 어떤 것을 꿈꿀 수 있다면, 그것을 실현할 수도 있다”면서 “나의 모든 것이 바로 생쥐 한 마리에서 시작되었음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디즈니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꿈을 향해 전진하는 열정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파시켰다. 휘하의 미술가들과 수백 명에 달하는 직원들에게 꿈의 날개를 마음껏 펼치도록 격려했다. 디즈니의 꿈에 매료된 직원들은 그의 꿈을 나눠 갖기 시작했다. 그가 직원에게 나누어준 꿈은 열정이 되어 지금도 디즈니랜드에 살아 있다. 이것이 디즈니 리더십의 요체인 꿈의 힘이다. 

어떤 부부가 디즈니에서 인턴사원을 하고 있는 아들의 초대로 디즈니월드를 방문했다. 관람 도중 아들은 부모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표정이 시무룩한 한 여성관람객에게 다가갔다. 재밌는 몸짓과 말로 관람객의 표정을 밝게 바꿔놓고 돌아온 아들은 궁금해하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 분이 계속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도 얼굴을 찡그릴 것 아니겠어요? 여기는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인데 그러면 안 되죠.” 아버지는 아들의 프로정신을 대견해하면서도 한마디 물었다. “월트 디즈니가 죽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그 사람이 말한 비전 타령이냐?” 아들은 “디즈니는 없지만, 그의 비전은 여기에 살아 있습니다”라며 “그것이 바로 디즈니 테마 동산이 세계 초일류로 운영되는 이유”라고 답했다. 

울상인 손님의 기분을 바꾸라는 규정은 디즈니월드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정식 직원이 아닌 인턴 사원조차도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꿈의 동산을 만드는 데 동참하겠다”는 열정을 공유하도록 한 게 디즈니의 업적이다.

디즈니의 성공은 꿈·믿음·용기·실천이라는 네 가지의 핵심요소를 종업원들에게 전파하고 감동시키며, 실천하게 함으로써 이뤄진 것이다. “믿음·소망·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는 성경식 표현을 빌리자면, 디즈니 리더십의 요체는 꿈·믿음·용기·실천이고, 그 중의 제일은 바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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